수수께끼
- 5월 10일
- 2분 분량

<장면들> 제 12 장 * 수수께끼
내가 자란 곳, 나의 고원처럼 여겨지는 장면들이 있습니다.
대부분 어릴 적 본 풍경이에요.
지리산의 바위, 은빛 세숫대야
아기 부처 어깨 위로 떨어지던 물방울
할아버지가 다친 손으로 과일을 깎고
짚을 엮어 복조리를 만들던 모습.
그 자체로 온전하고 완전했던 손의 율동.
그 장면들이 씨앗이 되어
내 안에 심어지고...
많은 것들이 피었음을 나중에 알았습니다.


제게 요상한 ‘창’이 되어주는 존재들도 있어요.
이 존재들은 하나의 세계, 벽을 허무는 존재처럼 여겨집니다.
저의 창작물에 자주 등장하지요.
신발, 의자, 귀


특히 ‘귀’의 이미지는 제게
“보이는 것보다 선행하는 것, 분절되어 있으나 완전한 것”을 상징하는 오랜 표상이었습니다.
어쩌다 ‘귀’를 이렇게 여기게 되었을까요?
처음에는 그저 떠오르는 대로 작업했고
역시 나중에 답을 알게 되었어요.

몇 년 전 어느 날, 섬광처럼
‘연’을 만들어 날려야겠다는 큰 이끌림을 느꼈어요
내면에 있던 어떤 것의 발현,
‘연’이 ‘귀’를 나타내는 것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.

어릴 적, 아빠가 들려준 ‘귀 무덤’ 이야기.
탄압받던 시절, 무고한 사람들의 잘린 귀가 묻힌 무덤이 가까운 지역에 있다고요.
그 이야기를 들은 어린 저는, 종종 상상했던 것 같습니다.
그 귀들이 들을 수 있었을 소리들
묻힌 귀들을 꺼내 자유롭게 하기
유영하는 귀가 ‘가느다란 실 형태의 소리’를 만나는 모습 ... ...

“연”, 날고 있지 않아도 '비행 가능성'이 잠재된 존재.
묻힌 귀들에 연이라는 형태를 입혀
그것이 하늘을 누비는 장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드러났구나.


이 무렵 작업하던 ‘birth’와도 교차하는 지점이 있었어요.
순간과 순간이 맞닿는 감각을 모래로, 또 실로…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어느 형태로 느끼며
그 감각을 birth로 표현했지요.


귀, 연, 모래는 사실 하나인 것.
그 감각들, 하나의 모래알, 모래알, 모래알이 거대한 사막을 이룬 모습.
드넓은 사막 위를 나는 연(귀)의 장면을 오랜 시간 꿈꿨습니다.

birth를 완성하고 그토록 그리던 사막으로 떠났습니다.
그곳에서 연을 띄우고 birth의 장면을 놓아보았습니다.
이 또한 영화를 만드는 과정처럼 느껴졌어요.


동트기 전,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
하얀 연, 하얀 귀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며 느꼈던 마음은
말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요.

이렇게, “제 12 장” 의 장면을 소개합니다.
저녁 하늘을 헤엄치는 연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.
<장면들>을 봐주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새로운 연을 만들었습니다.
감색으로 염색된 우리나라의 한지로 몸을,
그 아래 ‘귀’ 모양의 종이, 미색의 긴 꼬리를 달았습니다.
청명한 저녁 하늘, 금성과 목성 사이로 연이 납니다.
여기에 작은 기도를 실었습니다.
어릴 적 마음에 새겨진 장면들이
스스로 변형하며
이런 모양으로 저를 자라게 했습니다.
스스로를,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
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도요...!



긴 시간을 사이에 둔 단어와 장면들이 훗날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하고
숨어있던 의미를 발견하는 것.
그 과정에서 크고 조용한 환희를 느낍니다.
이 모든 여정이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는 수수께끼 같습니다.
지금 이어가고 있는 작업들에서는 또 어떤 모양으로 드러날까요?


감사합니다.

댓글